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프로부스]] ==== 아우렐리아누스는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 사상 초유의 사건 이후 벌어진 혼란과 갈리에누스 암살로 벌어진 국가적 위기를 모두 극복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잔혹한 단점으로 어이없게 암살됐다. 이렇게 아우렐리아누스가 측근 에로스의 농간으로 암살되자, 로마 제국은 무려 5개월간이나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된 끝에 75세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가 황제로 선택되었다. 타키투스는 로마의 유명한 역사가인 푸블리우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후손은 아니지만, 어쨌든 경험이 풍부한 원로원 의원이었고 당시 원로원 안에서 군부와 소통이 가능한 원로였다. 따라서 그는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아무도 황제 자리를 내켜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황제로 추대됐다. 그럼에도 타키투스의 제위는 불안해, 그는 처자식이 있음에도 전 재산을 기부했다. 타키투스는 즉위 이듬해 시리아로 향했지만 도중에 죽는다. 노환이라는 말도 있고 암살이라는 이야기가 모두 있는데, 이렇게 타키투스가 사망하자 원로원은 타키투스의 이부동생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로리아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 로마 군단은 이를 거부하면서, 아우렐리아누스 암살 직후부터 타의에 의해 차기황제로 추앙받는 장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를 로마 황제로 추대하였다. 프로부스는 아우렐리아누스 생전부터 당시 황제였던 아우렐리아누스와 군공과 명성에 있어, 어깨를 나란히 한 실력있는 장군이었다. 그는 넓은 제국 안에서 모든 적과 싸워 승리한 명장이었고,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제국을 멸망시킨 뒤 동방 일대 치안 안정과 행정 재건 책임을 위해 동방 속주 통치권을 받은 상태였다. 프로부스는 아우렐리아누스와 그 재능과 업적은 비슷했음에도, 교양있고 겸손한데다 정치력과 통치력은 한 수 위로 평가받았다. 따라서 그는 순수 군인 출신임에도 플로리아누스를 추대한 원로원에게도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원로원과 사이가 상당히 좋았는데 실제 통치 방식 역시 전형적인 로마 황제라서 원로원과 일반 민중들을 존중했다. 하지만 프로부스는 단독황제가 된 이후, 갈리아와 벨기카를 유린한 프랑크족을 격퇴해야만 했고, 서방 일대를 시작으로 도나우 강과 이집트, 레반트, 소아시아 일대까지 돌아다니며 외적을 격파해야만 했다. 이때 프로부스는 민생안정과 경제재건을 위해, 퇴역병과 현역병사들을 공사현장에 투입시키고 밭을 일구게 했다. 또 그는 포로로 잡힌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등을 로마군에 징집하거나 그들을 황무지에 살도록 하면서, 로마인들의 세금부담을 줄인다. 따라서 그는 원로원, 로마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고, 로마 제국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프로부스의 이런 통치 방법은 마구잡이로 모든 공사현장에 투입된 일부병사들에게 불만이었고 그들 중 일부는 이런 황제의 결정에 불만을 표했다. 따라서 프로부스는 AD 282년 여름, 페르시아 원정길 도중 고향인 시르미움 근교의 늪지대 매립 공사 감독 도중 일부 병사들이 일으킨 폭동에 휩쓸려 어이없게 암살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